테니스를 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익숙해지는 이름들이 있다. HEAD, Wilson, Yonex, Lacoste, Babolat. 라켓이나 스트링, 테니스웨어를 고를 때 한 번쯤은 마주치는 브랜드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을 처음부터 ‘테니스 브랜드’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들의 역사를 따라가 보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어떤 브랜드는 스키에서 시작했고, 어떤 회사는 도축·육가공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을 활용했다. 또 어떤 회사는 어업용 목재 부표를 만들었고, 라켓보다 스트링을 먼저 만든 회사도 있다.
지금 우리가 코트에서 만나는 브랜드들의 시작은 생각보다 훨씬 다양했다.
HEAD는 원래 스키 회사였다
지금의 HEAD를 생각하면 테니스 라켓부터 떠오르지만, 시작점은 눈 덮인 산이었다. HEAD의 창업자 하워드 헤드는 1940년대 후반 알루미늄과 복합 소재를 활용한 새로운 스키를 개발했고, 1950년 HEAD Ski Company를 설립했다. 당시 HEAD의 핵심 관심사는 테니스가 아니라 스키였다.
그러다 1960년대 들어 새로운 영역으로 눈을 돌린다. 바로 테니스였다.
1969년 HEAD는 최초의 알루미늄 테니스 라켓을 선보이며 본격적으로 라켓 시장에 진입했다. 흥미로운 건 이 과정이 단순한 사업 확장이었다기보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소재와 제조 기술을 새로운 스포츠에 적용한 결과였다는 점이다. 스키에서 시작한 기술이 테니스 라켓으로 이어졌고, 오늘날 HEAD는 테니스와 스키를 대표하는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 중 하나가 됐다.
Wilson의 시작은 스포츠가 아니었다
아마 가장 의외일 수 있는 이야기는 Wilson일 것이다. 1913년 시카고에서 시작한 회사의 뿌리는 육가공 산업에 있었다. 당시 Ashland Manufacturing Company는 육가공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을 활용하기 위해 설립됐다. 동물의 부산물에서 얻은 천연 소재를 이용해 테니스 라켓 스트링, 바이올린 현, 수술용 봉합사 등을 만들기 시작했다.
즉,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Wilson의 시작에는 테니스 라켓보다 먼저 ‘동물의 부산물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라는 제조업의 고민이 있었다. 이후 Thomas E. Wilson이 경영에 참여하면서 회사는 스포츠 용품 사업을 적극적으로 확장했고, 야구·골프·풋볼·농구·테니스 등 다양한 종목으로 영역을 넓혀갔다.
테니스 스트링에서 시작한 작은 연결고리가 결국 오늘날의 Wilson을 만든 셈이다.
Yonex는 라켓 회사가 아니라 목재 회사였다
Yonex의 출발점 역시 의외다. 1946년 일본에서 창업한 Yoneyama Company는 처음부터 라켓을 만들지 않았다. 창업자 미노루 요네야마가 처음 만든 것은 어업용 목재 부표였다. 당시에는 목재가 중요한 소재였지만, 플라스틱 부표가 등장하면서 기존 사업은 위기를 맞았다.
회사는 이 위기를 계기로 새로운 길을 찾았다. 목재를 다루던 기술을 살려 1957년 배드민턴 라켓을 제조하기 시작했고, 이후 자체 브랜드 라켓으로 영역을 넓혀갔다. 그리고 오늘날의 Yonex가 됐다. 어업용 부표를 만들던 목재 가공 기술이 배드민턴 라켓으로, 그리고 다시 테니스 라켓과 골프 클럽, 스노보드 등으로 확장된 것이다. 위기가 기술 전환의 계기가 된 대표적인 사례다.
Lacoste는 처음부터 ‘브랜드’가 아니었다
Lacoste는 조금 다른 경우다. 회사의 출발점에는 공장이나 제품보다 한 명의 테니스 선수가 있었다. '르네 라코스테'는 1920년대 세계 정상급 테니스 선수로 활약했고, 그의 별명은 ‘악어(Crocodile)’였다. 이 별명이 훗날 브랜드의 상징이 된다. 1933년 르네 라코스테는 앙드레 질리에와 함께 Lacoste를 설립했다. 같은 해 기존의 답답한 테니스 복장을 대신할 수 있는 가볍고 편안한 피케 소재의 폴로 셔츠를 선보였다.
오늘날 너무나 익숙한 ‘악어 로고’와 폴로 셔츠의 시작이 사실은 테니스 코트에서 더 편하게 움직이기 위한 한 선수의 고민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Lacoste는 일반적인 스포츠 브랜드와 조금 다르다. 브랜드의 정체성 자체가 테니스 선수의 역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Babolat은 119년 동안 라켓을 만들지 않았다
Babolat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1875년 시작한 Babolat은 라켓 제조 회사가 아니었다. 당시 회사가 집중했던 것은 스트링이었다. 천연 거트(natural gut)를 활용해 라켓용 스트링을 만들었고, Babolat은 이를 세계 최초의 테니스 스트링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다. Babolat이 첫 번째 테니스 라켓을 선보인 것은 1994년이다. 1875년에 시작해 1994년까지. 무려 119년 동안 라켓 없이 스트링을 만들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 첫 라켓이 바로 지금도 Babolat을 대표하는 Pure Drive였다. 스트링을 만들던 회사가 라켓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Babolat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테니스 브랜드의 시작은 모두 달랐다.
이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은 테니스를 대표하는 브랜드가 됐지만, 처음부터 테니스만을 바라보고 시작한 곳은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스키를 만들던 회사가 라켓을 만들기 시작했고, 육가공 산업에서 출발한 회사는 스포츠 용품으로 영역을 넓혔다.
목재 부표를 만들던 기술은 라켓으로 이어졌고, 오랫동안 스트링만 만들던 회사도 결국 라켓 시장에 뛰어들었다. 서로의 출발점은 달랐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과정에서 테니스라는 시장을 만나게 된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코트에서 만나는 브랜드들은 처음부터 완성된 모습으로 존재했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각자의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고, 변화하는 시장에 적응하면서 지금의 모습까지 만들어왔다. 그래서 라켓 하나를 보더라도 단순히 “어떤 성능을 가진 제품인가”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 뒤에는 한 회사가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어떤 변화를 거쳐 지금의 자리에 왔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테니스 브랜드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일은 결국, 테니스가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살펴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음번 코트에서 익숙한 로고를 발견한다면, 한 번쯤 그 브랜드의 첫 페이지를 찾아보는 것도 꽤 흥미로울 것이다.